기후변화, 탄소중립은 분명 위기다. 국난 극복이 특기인 우리 민족에게도 역대급 난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관점이나 발상을 바꾼다고 위기가 기회로 바뀌지 않는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모든 기운과 의지와 역량이 때맞춰 한데 모여야 기회가 된다. 각 부문 간 움직이는 방향과 속도가 맞아야 한다. 사회 그룹 간 논란과 갈등을 해결하고 합의를 형성해 함께 움직여야 비로소 기회로 바꿀 수 있게 된다.
기후위기, 탄소중립은 전 세계 그리고 국내에서 엄청난 변화와 갈등을 몰고 올 것이다. 일찍이 1990년부터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시작한 유럽과 달리 우리는 이제부터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탄소중립을 추진해야 한다. 자연히 변화의 폭, 갈등의 골은 훨씬 크고 깊을 수밖에 없다.
갈등의 양상도 더욱 복잡다기하게 분화할 것이다. 일례로 이전엔 ‘환경 대 개발’이란 큰 틀의 대립 구도가 공공 갈등의 주종을 이룬 반면 앞으로는 ‘환경 대 환경’이 상충하는 ‘녹녹(綠綠) 갈등’이 빈발하게 된다. 지구적 차원의 기후위기를 중시하는 측은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확충을 적극 추진하려 한다. 반면, 지역의 생태를 지키려는 쪽은 그에 맞서면서 갈등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래저래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기관에서 정책, 사업, 인허가 등 업무를 추진할 때 갈등이나 민원에 휩싸이는 경우가 늘게 된다.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와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상향안이 확정됐고 이제 부문별, 부처별, 지역별 실행 단계로 들어가게 되면 갈등도 본격적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산림청 사례서 본 정책 갈등 대응법의 시금석
향후 부문별 탄소중립 이행계획을 수립·추진하는 과정에서 빈발할 여러 갈등의 예고편에 해당하는 사례가 얼마 전 벌어졌다. 2021년 1월 산림청이 발표한 ‘산림부문 탄소중립 전략안’이 기폭제였다. 이를 두고 환경단체는 “산림은 생물종 다양성, 생태계 보전 등 다양한 기능이 있는데 산림청의 전략안은 탄소 흡수 기능만을 앞세우고 다른 기능은 무시하는 계획”이라며 반발했다. 이어 5월 강원도 홍천의 대규모 벌목 현장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1967년 산림청이 개청해 국토 녹화를 주도해온 이래 이렇게 뭇매를 맞은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갈등이나 위기는 누구에게나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 공공정책·사업의 흔한 흐름으로 도식화된 게 이른바 ‘DAD 사이클’이다. 정부가 어떤 정책이나 사업을 결정하고(Decide) 발표하는(Announce) 순간 갈등이 벌어져 방어하는(Defend) 악성 사이클의 연속이다. 국내 공공영역에서도 늘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산림청의 대응은 달랐다.
세상 만물의 변화의 이치를 다룬 <주역>의 핵심 원리는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궁하면 변하라. 변하면 통하리라. 통하면 영원하리라.)’ 아홉 자로 요약된다. 산림청의 대응도 그대로 진행됐다.
먼저 궁즉변. 산림청은 궁한 지경에서 변화를 택했다. 탄소중립 전략안에 대한 비판·공격에 대해 해명하며 방어·고수하기보다는 열린 자세로 환경단체 등과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의 길을 모색했다.
탄소중립 전략안처럼 정부의 정책기조나 큰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을 때 효과적 접근법은 ‘정책 다이얼로그’다. 미국 연방정부에서 환경정책의 기조를 ‘환경 관리’에서 ‘생태계 보전’으로 전환할 때 활용해 효과를 거둔 바 있다. 산림청도 이를 적용하기로 하고 환경단체, 임업계, 전문가, 산림청, 환경부 등이 참여하는 ‘산림부문 탄소중립 민관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어서 변즉통. 민관협의회는 2021년 7월 출범한 후 3개월여에 걸쳐 22차례 회의를 열며 고밀도의 소통 과정을 진행했다. 때론 자정도 넘기며 밤늦게까지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벌기령(합법적으로 나무를 자를 수 있는 기준) 및 영급 구조 개선 문제, 기후 수종과 목재수확량 문제 등 6개 쟁점을 의제로 정하고 검토·협의 작업을 벌였다. 산림바이오매스 분과를 따로 두고 산림의 탄소흡수량 산정 문제를 검토하는 전문가그룹 회의도 별도로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통즉구. 쟁점은 많은데 기간은 짧고 입장 차이는 커서 합의는 극히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모든 위원이 열정적으로 협의에 임한 결과 마침내 10개 항의 합의문을 작성하게 됐다. 논란이 됐던 ‘30억 그루 나무 심기’와 ‘영급 구조 개선’ 대신 산림의 다양한 기능을 조화롭게 살리며 탄소흡수량을 증진하는 내용이다. 앞으로 우리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지속 가능한 산림정책을 펴나갈 큰 방향을 사회적 합의로 마련한 것이다.
문제 해결 위한 정부의 열린 자세 중요
이 사례는 여러 면에서 의미가 크다. 탄소중립 관련 정책 갈등은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상충하는 데다 전문적 이슈까지 한데 얽히는 고난도의 복합 갈등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산림청 사례는 녹녹 갈등의 양상까지 더해졌다.
환경단체와 정부당국이 중요 정책 갈등 사안에 합의하는 일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드문 일이다. 국가정책과 연관된 과학적 이슈에 대해 입장이 다른 학자들이 모여 공동 검토 끝에 일치된 결론을 도출하는 일도 극히 힘든데 이번 갈등이 합의로 마무리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당국의 열린 자세, 적극적 노력이다. 갈등 상황에 처했을 때 관행처럼 방어에만 몰두하며 더욱 궁색한 처지로 가기보다는 역으로 열린 자세로 전환하고 관련된 모든 이들과 대화와 협의로 소통해 합의를 형성하고 함께 지속 가능한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강영진 2050 탄소중립위원회 국민참여분과위원장
(한국갈등해결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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